격렬한 싸움을 계속하였다. 1570년에는 휴전조약을 체결하여 한때 양파는 타협에 도달하였다. 그리하여 조약을 굳게 하기 위해 그들은 양파 간의 혼인을 성립하게 되었다. 카트린느는 그녀의 딸인 구교도 마고(Margot, Margaret)와 나바르의 새로운 왕인 신교도 앙리(Henry)를 결혼시키기로 결심한 것이다.
위그노들 사이의 종교적인 갈등은 시민전쟁 즉 종교전쟁으로 악화된다. 생 바르텔르미의 학살(1572년 8월 24일) 사건은 하룻밤에 파리의 모든 신교도들을 학살했다.
이후, 어머니에 의해 프로테스탄트 종교 속에서 키워진 앙리 4세가 1589년 프랑스의 왕이 되었을 때(부르봉왕가의 첫번째 왕), 그는 가톨
앙리 2세의시기에, 프랑스의 신교는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칼뱅파의 교리와 조직을 완전히 수용하여 위그노라는 집단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프랑스 종교개혁의 특징은 귀족층의 참여가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왕족인 나바르 가, 부르봉 가, 콩데 가, 샤티옹 가, 앙들로 가, 콜리니 등의 쟁쟁한 대 귀족
드디어 화해의 세상이 온 것으로 알고 기뻐한다. 그러나 카트린의 무서운 음모는 결혼 축제가 끝난 날 새벽에 드러난다.
프랑스 역사에 ‘성 바톨로뮤의 대학살’로 기록된 사건. 신교도(위그노) 5000명이 학살당한다. 마고는 신교도 라 몰르를 숨겨주며 간호하면서 진실한 사랑을 발견한다.
종교라는 양상은 왕국의 통일성 (cujus regio, ejus religio 하나의 국왕, 하나의 국가)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가톨릭 당파는 몽모랑시(Montmorency)원수와 프랑스와 드 기즈(Francois deGuise)의 지휘하에, 신교도 위그노(Huguenots)파는 앙트완 드 부르봉(AntoinedeBourbon), 루이 드 콩데(Louis de Conde) 그리고 꼴리니(Ga